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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음식의 고향, 개성

등록일
09.08
조회수
277
개성이라고 하면 개성상인과 인삼이 떠오른다. 그만큼 개성은 인삼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려 인삼을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것도 아마 상재(상재(上梓): 재나무에 새기다 곧 인쇄에 부친다는 뜻)가 빼어난 개성상인일 것이다. 고려 시대에도 인삼은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 이후에도 홍삼은 중국과 일본에 수출했던 한반도 명산품이었다. 이러한 인삼은 약재로 유명하지만 또 음식재료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제 개성음식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삼음식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릇에 담긴 인삼
<사진 1. 인삼>

  인삼은 이름이 많다. 수삼, 백삼, 홍삼으로도 불리는데 가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뉜다. 수삼은 건조하지 않은 생삼을 말한다. 수삼은 물기가 사라지면 썩어버린다. 그래서 생삼은 보통 10℃ 정도에서 10일 정도밖에 보관할 수 없다. 그러니 인삼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백삼이나 홍삼으로 가공을 한다. 백삼은 보통 4년 동안 재배한 수삼의 껍질을 벗겨낸 다음에 햇볕에 말려서 만든다. 홍삼은 보통 6년 동안 재배한 수삼을 물로 깨끗하게 씻고, 수증기로 찐 다음 말린 것이다. 홍삼은 그 색깔이 붉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810년에는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는 증포소가 개성에 설치될 정도로 홍삼 수요가 급증하였다. 날이 갈수록 고려 인삼은 유명해졌고, 일제 강점기가 되면 조선총독부도 인삼재배와 백삼과 홍삼 가공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1910년대 이후가 되면 국내에서도 백삼이나 홍삼이 부자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소비되기 시작하였다.

닭국에 등장한 인삼가루, 삼계탕의 시작?
우리가 요즈음 여름 보양식이라고 제일로 치는 음식이 삼계탕이다. 10여 년 전 쯤 베트남에 한식당 조사를 갔을 때 제일 인기가 좋은 한식당이 바로 삼계탕집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고려인삼이 워낙 유명하고 건강에 좋기 때문에 한국 삼계탕을 찾는다고 하였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는 것은 우리나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삼계탕은 인삼이 대량 재배되기 시작한 1910년 이후 값이 싼 백삼가루를 이용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1917년 판 <조선요리제법>에 소개된 ‘닭국’에 넣는 인삼가루이다. “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발과 날개 끝과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뱃속에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잡아맨 후에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이나리라.” 고 하였다.
   이후 1936년에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도 닭국이 나온다. 여기서 닭국은 한자로 ‘鷄湯(계탕)’이라 적는다고 했다. “닭을 잘 퇴하여 굵게 찍어서 장치고 파를 썰어 넣고 후춧가루를 치고 주물러서 솥에 넣고 물을 조금 치고 볶다가 다시 물을 많이 붓고 무나박을 썰어 놓나니 다 끓은 후에 고춧가루 쳐서 먹나니라. 또는 닭의 내장을 빼고 뱃속에다가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꿰매어 끓는 물에 넣고 고와서 먹기도 하나니라.” 이 조리법은 1917년 판 <조선요리제법>의 것과 거의 비슷한데 이 시기에 닭국에 인삼가루를 넣는 조리법에 일반화된 듯하다.  
  이렇게 인삼은 몸에 좋으므로 이를 활용한 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었다. 이 이후 계삼탕이란 음식이 본격적으로 음식점의 메뉴로 등장하는 때는 1950년대 중반 이후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계삼탕은 대중적인 음식으로 판매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삼가루로 만든 닭국이었다. 이때 닭국이라는 음식명보다는 계삼탕이 더 인기 있었고 이후 음식점 메뉴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가 되면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는 인삼이 더 강조된 음식이름이다. 
인삼을 넣고 끓인 삼계탕
<사진 2. 인삼을 넣고 끓인 삼계탕>

소설 <미망>의 개성 인삼음식
이렇게 우리들은 인삼음식하면 삼계탕을 먼저 떠 올리지만 그 이전부터 인삼의 고장인 개성에서는 오래전부터 인삼음식이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관련 자료를 찾기는 어렵지만 개성출신 소설가인 박완서가 자신의 고향인 개성 인삼상인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인 <미망>에만도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인삼음식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1800년대 후반 이후 개성을 그린 것으로 이미 이렇게 다양한 인삼음식이 발달한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인삼, 포삼, 백삼, 퇴각삼, 후삼, 미삼, 홍삼, 독삼탕(기생삼+대추), 인삼즙, 인삼정, 인삼차, 홍삼엑기스차, 인삼정과

다음으로 과거 문헌을 통해서 전래되어 내려 온 인삼음식을 크게 탕, 분말, 정과, 차, 인삼당, 미음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끓여서 차처럼 마신 인삼탕
인삼 등 재료를 넣고 푹 끓여 진하게 우려낸 것을 인삼탕이라고 한다. 인삼만으로 끓이기도 하고 다른 약재와 섞어 끓이기도 한다. 고려 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인삼을 탕으로 달여 차처럼 마셨다. 먼저, 개성에서 인삼탕을 먹은 것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살았던 대문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선생의 시1)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즉사(卽事) 나무 위엔 바람 소리 초당은 냉랭한데 / 樹上風聲冷草堂 
화로 속의 불기운에 인삼탕 보글보글 / 爐中火氣沸蔘湯 
시월 달 지나고 나니 몹시도 추운 날씨 / 小春過了天寒甚 
궤안 기댄 서생은 머리에 서리 내린 듯 / 隱几書生鬢似霜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삼이 임금의 옥체가 미령할 때 달여 올렸다. 또 조선 숙종 시대의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구급법으로 인삼탕을 사용하였으며, 각 개인의 문집에도 인삼탕을 달여 마셨던 기록이 나와 병구완을 위해 인삼탕을 복용한 것 등을 알 수 있다. 
  또 조선시대 김식(金湜)이 남긴 시2) 에서도 인삼탕은 일미라고 하고 있다. “비 개인 공관(公館)에 더위 티끌 없는데, 전일 산을 보던 나그네 지금 또 왔네~ 물에 스치는 새 볏잎은 부드럽기가 이끼 같구나. 일미의 인삼탕(人蔘湯)에 일백 근심 사르니, 무어라 술을 마시며 시재주를 허비하리.” 라고 하였다.

위병에 좋은 인삼죽
위가 안 좋은 소화기계 질환의 경우에는 인삼죽을 먹었다. 인삼죽은 <동의보감>(1613)에 “ 인삼의 뿌리는 반위(反胃)로 죽어 가는 사람을 치료한다. 인삼 가루 3돈, 생강즙 5홉, 좁쌀 1홉으로 죽을 쑤어 빈속에 먹는다.” 고 나온다. 그리고 어의를 지낸 전순의가 지은 <식료찬료>(1460) 에도 ”반위(反胃)와 신물을 토하는 것을 치료하려면 인삼가루 반량 생강즙 반량씩을 준비한 다음, 물 2되를 넣고 삶아 1되가 되도록 한다. 좁쌀(粟米) 1홉을 넣고 삶아서 묽은 죽[稀粥]을 만들어 허기질 때 즉시 먹는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세비결>(1929)에도 “반위(反胃)와 신물을 토하는 것을 치료하려면 인삼가루 반량 생강즙 반량씩을 준비한 다음, 물 2되를 넣고 삶아 1되가 되도록 한다. 좁쌀(粟米) 1홉을 넣고 삶아서 묽은 죽(稀粥)을 만들어 허기질 때 즉시 먹는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인삼죽은 음식이지만 반위와 같은 질환에 효과적인 약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사치한 인삼정과를 금지하였다
정과는 식물의 뿌리, 줄기, 열매 등을 통째로 또는 썰어서 날 것 혹은 삶아서 꿀이나 설탕으로 조린 것을 말한다. 정과 중에 인삼을 사용한 것이 인삼정과인데 문헌상으로 인삼을 이용한 음식 중 최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인삼정과이다. 인삼정과는 마른 삼을 삶아 꿀이나 설탕물에 조린 것이고, 수삼정과는 수삼을 찌거나 삶아 쓴맛을 빼고 설탕과 꿀을 넣고 조린 것이다. 
  정과는 정약용의 <아언각비>나 <규합총서>에 꿀에 졸이는 방법과 꿀에 재워서 오래 두었다 쓰는 방법이 나와 있다.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인삼정과가 나온다. “옛날에는 이 요리가 없었는데 근래에 와서 가삼(家蔘, 재배한 인삼)이 모싯대나 도라지처럼 저렴해지면서 이 요리가 생겼다. 가삼의 머리 부분을 자르고 거친 껍질을 제거하고 편으로 썬다. 삶지 않고 바로 달인 꿀에 절인다. 쇠솥을 쓰면 안 되고 놋가마나 은그릇이나 돌그릇을 사용하여 부풀어 오르게 끓이면서 호박색이 날 때까지 조린 다음 사기 항아리에 넣어 앞의 조린 꿀을 채워 넣고 밀봉했다가 두고 쓴다.”고 하였다. 1600년대 <영접도감의궤>의 인삼정과와 1800년대 의궤에도 대추, 복분자, 수박, 맥문동, 인삼, 건포도, 송이 등 다양한 정과 중 인삼정과도 들어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영조 7년 (1731)에는 국상[國恤]의 제수(祭需) 가운데 인삼정과(人蔘正果)사용을 금한다는 관심을 끄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인삼정과를 지나치게 만들어 먹어서 백성을 괴롭히자 이를 금해 달라는 상소를 접한 영조가 내린 명이다. 인삼정과는 귀한 인삼으로 만들어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인삼이 좀 더 대중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1921)에는 인삼이 들어가는 인삼정과가 나온다. 만드는 방법으로는 “인삼을 불려서 삶아가지고 오랫동안 물에 담아 우려낸다. 그런 후에 두께는 한 푼, 너비는 세 푼, 길이는 한 치씩 되게 썰어서 꿀이나 설탕물에 졸인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귀한 대용차인 인삼차
인삼은 단독으로 끓여 마시기도 하고, 갈근, 진피, 생강 등과 같이 합하여 끓여 마시기도 한다. 문헌에는 인삼차 종류로 삼귤차(蔘橘茶), 삼길차(蔘吉茶), 삼령차(蔘苓茶), 삼부차(蔘附茶), 삼소차(蔘蘇茶), 삼연차(蔘蓮茶), 삼유차(蔘楺茶), 삼차(蔘茶), 삼출차(蔘朮茶), 단삼차(單蔘茶), 독삼차(獨蔘茶), 만삼차(蔓蔘茶), 사삼차(沙蔘茶), 삼강차(蔘薑茶) 등이 나온다. 
  이러한 이름의 차들은 인삼과 함께 귤, 복령, 자소엽, 생강 등과 섞어 달여 마셨던 탕이자 차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다게(茶偈)에는 다약(茶藥)이 나오는데 차(茶)와 약(藥), 탕(湯)을 같이 보았다. 따라서 선왕에게 진다(眞茶)만 올린 것이 아니라 과일을 올리듯이 귀한 인삼차 등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때에는 인삼과 꿀 등을 넣은 차를 ‘다약(茶藥)’이라 했다. 다약(茶藥)은 인삼을 넣어 몸에 좋은 차로 쓰이는 약, 즉 대용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달달한 인삼당
단 것에 대한 갈망이 심했던 우리 조상들은 사탕인 당속도 많이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잔치에도 이를 빠트리지 않고 올렸다. 당속류는 주로 연회를 기록한 <의궤>의 진어찬안(進御饌案)이나 진어과합(進御果盒)의 각색당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올리는 각색당의 종류는 잔치마다 조금씩 다르나 옥춘당, 팔보당, 인삼당, 오화당, 청매당, 추이당, 수옥당, 호도당, 문동당 등이 나온다. 이와 같이 인삼당은 당속류에 속하며 설탕(꿀)에 졸여 굳혀 내는 것이다. 즉 인삼당은 설탕에 졸여 굳히며 인삼향을 넣은 사탕이다. 
 
몸에 좋은 보양죽인 인삼속미음
인삼을 사용하여 미음을 끓이는데 주로 속미음에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삼속미음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순조(純祖) 15년 12월 15일 약원의 건의로 대전과 왕대비전, 중궁전 등에 인삼속미음을 매일 달여 들이게 하다. 純祖 22년 12월 26일 가순궁이 들 인삼속미음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다. 純祖 34년 11월 13일 1냥쭝의 인삼과 속미음을 달여 들이라고 명하다. 純祖 34년 11월 13일 약원에서 왕세손에게 3돈쭝의 인삼과 속미음을 달여 들일 것을 보고하다.”고 여러 차례 인삼속미음을 올린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내의원의 처방에 따라 탕湯이나 차茶, 미음米飮의 형태로 진상되었는데, 왕실의 큰일을 앞두고 미리 내의원에서 타락죽을 내던 것과 같이 인삼을 넣은 속미음도 자주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미음은 왕실의 영향으로 반가에까지 많이 전파되었다.
  이후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1934)에는 인삼이 들어가는 ‘송미음(속미음)’이 나온다. 그 만드는 방법은 “황률(황밤) 20개, 차조 2숟가락, 대추 30개, 물 두 사발 반, 인삼 닷 돈. 대추와 황률과 차좁쌀을 깨끗하게 씻은 후 솥에 넣고 인삼을 잘게 썰어 넣고 물을 부어서 약한 불로 끓인다. 끓여서 1보시기쯤 되도록 졸여서 체에 받쳐 먹는다.”라고 하였다.

개성의 세계적인 명산품인 인삼은 과거부터 음식으로도 많이 먹었다. 지금도 먹고 있는 인삼음식들은 인삼의 주 명산지였던 개성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고려 인삼이 최고의 세계 건강약재이듯이 인삼음식 또한 개성음식의 최고봉이자 전 세계인들에게도 알려야 할 우리의 명품 한식이다.  



1) 목은시고 제31권 

2)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1권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1530년)




 정혜경 교수 -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채소의 인문학’ 저자 - 한국식생활문화학회 회장과 대한가정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농림축산식품부의 식품산업진흥 심의위원과 한식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우리 음식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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